2017.0901

나 어렸을 적…/私が子供の時(2017年9月)

나 어렸을 적..>

굉장히 거센 바람과 비.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태풍’이라는 녀석은 올해도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며 우리를 찾아왔다. 일본 오사카에서 느끼는 태풍의 강도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센 듯한 느낌이다.

나 어렸을 적.. 행여 천둥, 번개에 내가 놀랄까봐 세 명의 딸들을 옆에 두고, 막내인 나만 포근하게 안아주셨던 엄마 품이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

결혼하여 딸들을 연달아 세 명 낳고, 아들이기를 바라다가 또 임신이 되신 우리 엄마. 지금까지와는 다른 성별의 아이를 낳아보고 싶으신 우리 부모님이셨다.

배가 유난히 불러 아들인 줄 알았는데 낳아보니 또 딸이었다고 한다. 그게 나였다…

그때부터 파란만장한 나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집은 서대문 냉천동의 한옥집이었다. 안방과 건넛방, 작은 마당 넘어 공부방, 그리고 좁다란 담장길을 따라 아주 자그마한 골방이 있는, 그런 아담한 집이었다.

그곳에서 난 초등학교 2학년까지 살았고, 그 후 아주 크고 넓은 2층 양옥집으로 이사갔지만, 어린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그 한옥집은 아직도 내겐 마음의 고향이다.

첫째언니는 굉장한 큰 덩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엄마가 임신 중에 좋은 영양제를 많이 드신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우리 불쌍한 동생들을 무섭게 거느렸다.

둘째언니는, 첫째언니의 몸이 너무 커서 힘들게 낳으셨던 엄마였기에 이번엔 일절 영양제도 안 먹고 일부러 몸도 많이 움직이고 일을 하여, (첫째언니 때와는 반대로) 아주 작고 비실비실한 몸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첫째와 둘째 딸이 너무 극과 극의 대조를 보였기 때문에, 셋째와 넷째는 정상적으로 낳으려고 나름의 노력을 하셨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 딸 넷은 온 동네를 누비며 재미있게 오손도손 서로를 아끼고 감싸며 행복하게 자라났다. 부모님이 없을 때는 엄마 한복들을 꺼내 입고 공주놀이를 하며 놀았다. 첫째언니는 늘 왕비역할이었고, 둘째언니는 공주, 셋째언니는 신하, 막내인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김없이 거지가 되어 엄마의 예쁜 한복을 입을 기회조차 없었다. 한번은 배구놀이를 한답시고 안방에 줄을 긋고 풍선을 배구공으로 하여 한국팀과 일본팀이 되어 뛰어놀다가, 부모님이 제일 아끼시던 도자기를 깨뜨려서 아버지의 무서운 회초리 세례와 함께 ‘골방’에서의 한 시간 반성이라는 벌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의 여신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 우리 네 명의 딸들은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피아노를 전공한 첫째언니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 오랜기간 머물다가 대학교수가 되어 돌아왔고, 둘째언니는 프랑스어를 전공했지만 전공언어를 전혀 써보지도 못하고 인연도 없던 일본으로 시집가 살다가 위암에 걸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녀석을 두고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성악을 전공한 셋째언니는 음악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이젠 옛날의 천방지축 개구장이 딸들의 모습이 아닌, 각자의 삶을 멋지게 거느리며 살아가는 어엿한 대한민국 중년여성들이 된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아침이면 태양을 볼 수 있고 저녁이면 별을 볼 수 있음에 행복하고,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 깨어날 수 있음에 또한 감사하다고..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무사히 건강하고도 행복하게, 또한 평안하게 살아올 수 있었으니 그또한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내 나이 마흔 일곱. 내게도 ‘가정’이라는 것이 생겼고, 사랑스러운 아들들도 곁에 있다.

그러나 가끔씩 내 마음 한 켠이 허전하고 답답한 것은…

아마도 어렸을 적 내 가족들과 함께 지냈던 그 추억의 시간들로 돌아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그리움들이 교차해서가 아닐까.

오늘처럼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무서운 날씨엔,, 어린 시절 그저 부모님 밑에서 철없이 울고 떼쓰면 모든 것이 해결됐던 그 두껍고도 강력한 ‘보호막’이.. 그 ‘울타리’가… 무척 그립고 아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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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が子供時…>

とても激しい風と雨。

毎年必ずやってくる’台風’というやつは今年も強力なパワーを誇り、私たちを訪ねてきた。日本の大阪で感じる台風の強度は韓国より、はるかに強いような感じだ。

子供の時、もしかすると雷、稲妻に私がびっくりするかと思って三人の娘たちをそばに置いて、末っ子の私だけを穏やかに抱いてくれた母の懐が、本当に幸せだった。

結婚して娘たちを相次いで三人生んで、次は息子であることを望むうちに、また妊娠してしまった母。今までとは違う性別の子供を生んでみたい母だった。つまり、今度こそ男の子を欲しいと思っていた。いやにお腹が突き出して息子だとばかり思ったのに生んでみたらまた娘だったという。それが私だった。その時から波乱万丈の私の人生が始まったと言うべきか。

私が生まれた時、我が家はソウルの西大門冷泉洞にある韓屋だった。奥の間とむかい側の部屋、小さな庭を越えてのお勉強部屋、そして小さな塀に沿ってとても小さな小部屋のある、こじんまりとした小さな韓屋だった。そこで私は小学2年生まで暮らし、その後はとても大きくて広い2階の洋館の家に引っ越していったが、幼い頃の思い出がそのまま詰まった、その韓屋はいまだに私には心のふるさとである。

一番上の姉は、大柄な人で、(母が妊娠中に良い栄養剤をたくさん飲んだためだという)強力なカリスマで私たちか弱い妹たちを引き連れた。

二番目の姉は、一番上の姉の体が大きすぎて産むのにしんどい思いをした母だったので、今回は一切栄養剤も飲まずに意識して体もたくさん動かして仕事をし、(一番上の姉の時とは正反対に)非常に小さくひょろひょろした体で生まれたという。

長女と二女がとても極と極の対照を見せたため、三女と四女は、普通の子に生もうとそれなりの努力をしたと言う。

とにかく、私たちは町中を走り回りながら面白く仲良くお互いをいたわり、かばいあって幸せに育った。両親がいない時は母の韓服を取り出して着てお姫様遊びをして遊んだりもした。一番上の姉はいつも王妃の役割であり、下の姉は姫様、三番目の姉は臣下、末っ子の私はいつも自分の意志とは関係なく決まって乞食になって、母のきれいな韓服を着る機会すらなかった。ある時はバレーボールの遊びをすることになり、奥の間の真ん中に線を引き、風船をボールとして韓国チームと日本チームに分かれ遊び回っていたが、親が一番大事にしていた陶磁器を割って父の猛烈なむち洗礼とともに、あの怖い’小部屋’での一時間もの反省という罰を受けたりもした。

しかし、歳月の女神は私たちを放っておらず、私たち四人の娘たちは各自の道を行くことになった。

ピアノを専攻した一番上の姉はドイツに留学、そこで長い期間滞在し、ついに大学教授になって戻ってきており、二番目の姉はフランス語を専攻したが、専攻言語を全く使ってみることもできなくて、縁もなかった日本に嫁いでいって胃がんになり、愛する夫と息子を置いたまま先に天国に行ってしまった。声楽を専攻した三番目の姉は音楽教師として勤めている。もう昔のわんぱく娘たちの姿でなく、各自の生活をしっかり抱えながら生きていく、いつの間にかれっきとした大韓民国の中年の女性になったのだ。

誰かがこう言った。

朝には太陽が見られ、夜には星を見ることができることが幸せで、寝たら翌日の朝目覚めることができることもありがたいと。。。

振り返ってみると、今まで無事に健康で幸せに、また安らかに過ごして来れたから、これ以上ありがたいことはないと思う。

もう私も四十七才。私にも’家庭’というのができ、可愛い息子たちもそばにいる。

しかし、たまに私の心のどこかが物足りなくてもどかしい理由は。。。

おそらく子供の時私の家族たちと一緒に暮らしていた、その思い出の時間に二度と戻れないというもどかしさと懐かしさが次々と交錯しているからではなかろうか。

今日のように激しい雨が降り風が吹き荒ぶ恐ろしい天気の日には、、幼い時の、ただただ親の下で分別なく泣いて駄々をこねたらすべてが解決できた、その厚くてかつ強力な’保護膜’が、、、その’垣根’が、、、とても懐かしくてかすかに感じ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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